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우에스기 카게카츠 (문단 편집) === 전봉과 감봉 === [[임진왜란]] 때는 이에야스와 마찬가지로 히데요시에게 패배하고 항복한 다이묘가 아니기에 히데요시도 대대적으로 참전을 요청하기는 힘들었고, 이에 카케카츠도 1592 6.9 ~ 9.8 딱 3개월간 히데요시의 대리로서 나오에 카네츠구와 다카나시 요리치카(高梨頼親) 등을 대동하여 조선으로 도해하여 현재 [[창원시]] [[진해구]]에 있는 웅천왜성을 축성하였고, 그 기간 동안에도 싸움보다는 조선에서 서적을 털어가고 사람들을 납치해가는데 열을 올렸다고 한다. 1594년 관위가 중납언으로 승서되고, 1597년에는 [[오대로]]의 일원인 [[코바야카와 타카카게]]가 죽자, 그 뒤를 이어 [[오대로]]가 되었다. 1598년 1월, 히데요시는 당대 강력한 다이묘인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다테 마사무네]]가 손을 잡는 것을 두려워해 이 두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신뢰할 수 있는 카게카츠를 에치고에서 [[아이즈 번]]으로 전봉시키고 원래 90만석이던 아이즈를 120만석으로 규모를 더 키워줘 전국 넘버3에 들어갔다. 아이즈는 그 중요성 때문에 히데요시도 특별히 [[가모 우지사토]]에게 맡긴 영지였으나, 우지사토가 죽고 그 뒤를 이은 아들 히데유키는 어려서 가문에 내분이 일어나 아이즈를 가모 가문에서 우에스기 가문에게로 옮긴 것이다. [[세키가하라 전투]]가 일어나기 얼마 전, 카게카츠는 후시미저택을 떠나 아이즈 영지로 돌아가서 군비를 증강하고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도발했다. 이에야스는 우에스기 토벌군을 이끌고 출발했으나 아이즈로 향하는 도중 [[이시다 미츠나리]]의 거병 소식을 듣고 세키가하라로 향했다. 대신 [[모가미 요시아키]]와 [[다테 마사무네]]에게 우에스기 집안을 상대하도록 했다. 우에스기 군은 무문의 명문답게 다테군을 박살내며 선전했지만, 세키가하라의 패전소식이 전해지자 사기가 떨어지고 후퇴 및 수비 일변도로 변하여 모가미군과 다테군의 반공에 시달렸다. 패전 후 카게카츠는 '무운(武運)이 쇠한 것이니 이제 와서 놀랄 만한 것이 아니다.'라고 한 마디했을 뿐이라고 한다. 세키가하라 전투 후,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사죄를 요구했고, 1601년 8월 16일. 가신 [[나오에 카네츠구]]와 함께 [[오사카성]]을 찾아가 이에야스에게 사죄한다. 그리고 원래 영지의 북쪽 일부였던 요네자와로 영지를 옮기게 되고, [[고쿠다카]]는 120만석에서 30만석으로 4분의 1까지 줄어든다. 원래 이에야스는 [[가이에키]][* 영지 전부를 몰수하는 조치.] 처벌을 생각했으나 이에야스의 차남이자 우에스기 토벌군 대장이었던 [[유키 히데야스]]가 카게카츠를 높게 평가하여 적극적으로 구명하고, 나오에 카네츠구가 [[혼다 마사노부]]를 만나 나오에가의 후계자를 혼다 마사노부의 아들로 정하기로 한 끝에 가이에키는 면할 수 있었다. 이에야스에게 신종한 이후로는 [[오사카 전투]]에 도쿠가와측으로 출진, 겨울의 전투에서는 시기노, 이마후쿠에서 오오노 하루나가가 이끄는 도요토미군을 패퇴시키고 사타케군을 구원하는 등 전공을 세웠고, 여름의 전투에서는 교토 경비를 맡았다. 참고로 카게카츠의 인품에 매료된 가신들이 감봉에도 불구하고 집안을 떠나질 않아서 에도시대 초기 우에스기 가문은 엄청난 재정난에 시달렸다고 한다.[* 다른 가문의 경우 어쩔 수 없이 가신들을 정리해고하여 살 길을 도모했지만 우에스기 가는 차마 가신들을 내버릴 수 없어 [[정리해고]] 없이 모두 받아들였다. 비유하자면 [[삼국지연의]]에서 [[유비]]가 백성들을 모두 이끌고 힘들게 도망치던 것과 비슷한 경우라고 볼 수 있다.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대폭의 감봉 및 전봉된 다이묘들 상당수는 영지를 이전하면서 기존의 가신들에게 매우 촉박한 기한을 급작스럽게 통보하여 이동을 명령하고 많은 가신들을 기일을 지키지 못했다는 명목으로 해고하는 등의 방식으로 정리했다. 죠슈의 모리 등은 전봉이 아니라 기존 영지의 3~4분의 1로 영지가 감봉되어 훨씬 적어진 고쿠다카로 기존의 가신단을 사실상 그대로 유지하게 되었는데 그런 외양 웅번들은 에도 막부 내내 만성적인 재정적자에 시달려야 했다. 물론 점점 해당 지역들의 농업생산력이 높아지면서 19세기 무렵에는 번의 재정이 상당히 회복되기도 했다.] 게다가 요네자와번 4대 번주 우에스기 츠나노리(上杉綱憲)[* [[추신구라]]에서 악역을 담당한 키라 요시히사(吉良義央)의 장남, 요시히사의 정실이 요네자와번 2대 번주 우에스기 사다카츠(上杉定勝)의 딸. 키라 요시히사의 조상에서 두 번 외가를 건너면 전국시대에 망한 오기가야츠 우에스기씨(扇谷上杉氏)의 혈통으로 이어진다.] 시절엔 30만석의 절반인 15만석으로 감봉까지 되었다. 원래 3대 번주 우에스기 츠나카츠(上杉綱勝)가 아들도 없는 상태에서 양자 같은 후계자 지명도 없이 급사했기 때문에 후계자 없는 요네자와번은 원칙적으론 가이에키를 피할 수 없었다. 그러나 츠나카츠의 장인인 호시나 마사유키(保科正之)[* 에도 막부 2대 쇼군이었지만 공처가였던 [[도쿠가와 히데타다]](徳川秀忠)가 아내가 무서워 숨겨둔 자식으로 3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미츠]]의 이복동생이 된다. 형 이에미츠에게 꽤나 중용되어 [[아이즈 번]]까지 받았다.]의 노력으로 츠나노리를 말기양자[* 생전이 아닌 사후에 들인 양자. 한국사로 치면 봉사손과도 비슷하다.]로 들이는 것과 영지의 절반인 15만석 감봉의 조건으로 겨우 가이에키만은 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우에스기 가의 재정난은 계속되고, 후대 번주(藩主)들은 어떻게든 감봉된 영지의 회복을 꾀하고자 없는 돈에 [[빚]]까지 끌어다 [[로비]]까지 했는데,[* 상인들에게 돈을 빌리는 경우가 있었지만 규모가 큰 번들은 막부에 청원해서 막부로부터 상대적으로 저렴한 금리로 공식적인 대부금을 받는 경우 또한 있었다.] 오히려 이는 빚만 더 늘려서 막부에 영지를 반납할 것을 고려할 수준의 막장으로 치달았다. 이 재정난은 [[18세기]] 요네자와 번의 9대 번주 [[우에스기 요잔]]이 단순한 절약만이 아닌 적극적인 식산흥업과 복지정책, 의식개혁을 일으킨 덕에 그 만년에야 겨우 어찌어찌 수습된 뒤[* 15년만에 빚을 갚는데 청산했다. 얼추 재정상태가 괜찮았는지 대기근이 닥쳤는데도 굶어죽는 사람이 종전의 절반으로 감소했다고(에도시대에만 해도 중앙집권제가 아니다 보니 기근의 피해는 각 번들의 재정상태에 따라 달라지기도 했다).][* 운이 좋았는지 아니면 요잔의 노력 덕인지 몰라도 그의 시기 말엽에는 텐메이 대기근이 일본을 덮쳤는데 요네자와 번은 피해가 없던 4개의 번 중 하나였다.] 지역 명사의 지위를 계속 유지하며 현재에 이르고 있다. 도몬 후유지가 쓴 소설 우에스기 요잔(한국어 번역판 제목은 불씨)에 이 당시의 상황이 잘 묘사되어 있는데 전투씬이 전무함에도 불구하고 무슨 전투를 다룬 소설처럼 치열함이 느껴진다. 도쿠가와 가문과는 안좋은 인연으로 시작한 우에스기 가문이지만, [[보신전쟁]]시에는 의리를 지켜서 아이즈 번, 센다이 번 등과 함께 오우에츠열번동맹을 결성, 막부파에 가담했다. 그러나 전쟁에 지고, [[판적봉환]]이 실시되면서 요네자와도 몰수된다. 그래도 후손들은 신정부로부터 본가는 백작, 지번은 자작위를 받는 등 [[화족]]으로 대우받고 관직도 부여받으며 나름 좋은 대접을 받았다. 2021년 현재 요네자와 우에스기가의 당주는 카게카츠의 15대손에 해당하는 우에스기 쿠니노리(上杉邦憲, 1943년생)라는 사람인데, 우주공학자였다가 2006년 정년 은퇴했다고 하며, 우에스기 가문과 관련한 학술대회나 각종 행사에도 참석하고 있다고 한다. 우에스기의 본거지 요네자와에서도 시립 우에스기 박물관을 우에스기가의 재단이 운영하는 등 지역유지 대접을 톡톡히 받고 있다. 그 동생인 우에스기 다카하루(上杉隆治)는 음악가였다.(2004년 사망) 이 두 사람의 어머니는 [[도쿠가와]] 종가 출신이라서 오늘날 도쿠가와 종가와 요네자와 우에스기가는 인척 관계인 셈이다.[* 쿠니노리의 어머니는 도쿠가와 종가 17대 당주 도쿠가와 이에마사의 장녀이기 때문에, 이에마사의 차녀의 아들인 18대 당주 도쿠가와 츠네나리와는 사촌 관계가 된다. 참고로 츠네나리는 막말의 교토수호직으로 유명한 아이즈 번 9대 번주 마츠다이라 카타모리의 증손자로, 아들이 없는 외할아버지 이에마사의 양자가 되어 도쿠가와 종가를 계승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